1994년에 개봉한 트란 안 홍 감독의 그야말로 잔잔한 산정 호수 같은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의 줄거리와 감독 그리고
감상평을 써 보고자 한다.
줄거리
1951년 10살이 된 무이는 가족을 떠나 도시의 부잣집 하녀로 들어가게 된다. 그 집은 노마님과 주인 부부 그리고 그 부부의 아들 셋이 살고 있었고 7년 전 세 살의 나이로 죽은 딸이 있었다.
부잣집 하녀로서 시작된 첫날 아침 정원에 매달려 있는 푸른 파파야를 보며 일어난 무이는 제일 먼저 아침을 짓는 법을 배우게 된다. 그렇게 시중을 들던 무이는 주인집에 방문한 첫째 아들의 친구인 작곡가 쿠옌을 보고는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주인이 장사로 벌어 놓은 돈을 몽땅 가지고 나가는 일이 생긴다. 딸의 죽음 당시도 바깥에 나가 집을
비웠던 그가 딸의 죽음을 본인의 탓으로 여긴 후 몇 년을 근신을 하던 끝에 결국 다시 나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기우는 가세를 패물을 팔아 가며 어렵게 집안을 이끌어 가는 여주인을 둘째 아들만은 이해하고 위로를 해준다.
그러던 중 돌아온 남편이 다시 패물을 챙겨 나가려다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게 되고, 집안의 골동품까지 팔아 치료비로
써가며 살리려고 노력을 하지만 남편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만다.
시간이 흘러 10년 후 무이는 스무 살이 되고, 그 사이 집안의 가장이 된 둘째는 한량이었던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 집안일에는 관심을 버린 채 아버지의 유산인 가타만 만지작 거리는 사람이 되고, 자기 아내의 말을 따라 가세가 기울었다는 이유로 무이를 쿠옌의 집으로 보내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떠나게 된 무이에게 자기 딸이 크면 주려고 했다며 옷과 장신구를 건네는 어느새 노마님이 되어버린 여주인.
그런 주인집을 떠나 무이는 쿠옌의 집에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쿠옌을 모실 수 있게 된 무이는 더욱더 정성을 기울여 쿠옌의 시중을 들게 된다.
그런 쿠옌의 곁에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아무리 하녀라고 하지만 여자와 단둘이 지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고,
무이를 무시하려 하지만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던 중 자신을 정성 들여 시중을 드는 무이에 대한 감정이 서서히 커지는 것 느끼게 된 쿠옌은 그런 감정을 약혼녀에게
들키게 되고, 결국 둘은 파혼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무이와 쿠옌은 더 이상 자신들의 감정을 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서로를 알아가며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결말을 보이며 잔잔히 영화의 막이 내린다.
감독
이 영화의 감독 트란 안 홍은 베트남 다낭 출신으로 아버지를 다라 프랑스에 정착한 베트남계 프랑스인이다.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촬영상을 수상하여 단숨에 주목을 받게 되었고, 베트남어 영화로는 유일무이하게 아카데미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에 노미네이트 되어 자국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이듬인 1995년에는 '씨클로'로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
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린 파파야 향기', '씨클로'와 하노이를 배경으로 촬영한 '여름의 수직선에서'까지 베트남 3부작을 완성한 9년 만에
미국의 조쉬 하트넷, 한국의 이병헌, 일본의 기무라 타쿠야를 주연으로 한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연출했지만 베트남
3부작에서 보여준 성취들에는 다소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최근작으로는 '이터너티'가 있다.
감상평
첫 줄에 썼듯 잔잔한 산정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으로 감상을 했다. 바람이 불어 파문을 일어도 수면 위로
물 한 방울 튀어 오르지 않을 정도의 굴곡으로 자연스레 감정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에 보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주인집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들을 10살짜리 무이 시선에는 어떻게 보일까를 상상해 보니 자연스럽게 내 10살 때의
세상을 보는 시선이 겹쳐졌다. 하늘은 맑았고, 높았으며 바람은 시원했고 그래서 이런 날은 죽어도 상관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 생각했던 죽음이란 두려움의 대상, 슬픔의 대상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면 닥쳐올 과정 중에 하나였을 뿐이니까 그런 생각이 당연했었다.
그런 면에서 내 주변의 변화들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무이가, 그리고 그런 무이를 조용히 지켜볼 수
있는 순간들이 너무나 좋았다.
시끄럽고 잔인하고 복잡한 연출의 영화가 터져 나오다 못해 범람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잔잔하고 무덤덤한 듯 조용히,
아주 조용히 볼 만한 영화를 찾고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